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니체 후기 철학으로의 진입을 알리는 신호탄이자
'힘에의 의지'를 주저를 포기한 니체의 대표작이다. 이 책을 집필한 니체의 목적은 위버멘쉬로
대변되는 긍정의 철학을 건설하기 위해 건강한 미래인간의 모습을 제시하려는 데에 있다.
힘에의 의지, 영원회귀, 위버멘쉬, 신의 죽음 등 여러가지 핵심적인 사유들을 제시하지만
그 중에서 <영원회귀>를 핵심적 사유로 지목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즐거운 학문(1883)과 도덕의 계보(1885)의
중간시점에 저술되었으며 그가 포기하고 말았던 힘에의 의지 구상 직전에 집필되었다.
앞서, 언급했던 대로 이 책이 흔히 문학작품으로 분류되고 있는 가장 큰 이유가 철학서치고는
꽤나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기존의 철학서들이 추상적 이론의 연역적인 서술방식을
채택했다면 니체는 무매개적인 표현을 채택하였다. 이론가의 목소리 대신
예언가와 시인의 목소리, 즉 일종의 아포리즘 형식으로 그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니체는 비유와 상징 그리고 패러디를 많이 사용한다.
인물: 어린아이, 숲 속의 성자, 줄타는 광대, 배후세계론자, 왕, 예언가, 마술사...
동물: 낙타, 사자, 독수리와 뱀..
식물: 무화과 나무, 사과 나무
자연: 달, 태양, 무지개, 사막
시점: 정오, 오후 등등
패러디: 신약 성서 및 철학적 종교적 문화적 자명성 일체에 대한 패러디
책은 크게 1부의 차라투스트라의 머리말,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 2부, 3부로
나누어져 있으며 체계적인 구성이 아닌 임의적 구성이다.
<차라투스트라의 머리말>
- 차라투스트라의 하강
시점: 아침, 새로운 시작
"나는 베풀어주고 싶고 나누어주고 싶다. 사람들 가운데서 지혜롭다는 자들이 새삼스레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기뻐하고, 가난한 자들이 새삼스레 자신들의 넉넉함을 기뻐할 때까지.
그러기 위해 나 저 아래 깊은 곳으로 내려가야 한다. 네가 저녁마다 바다 저편으로 떨어져
하계에 빛을 가져다줄 때 그렇게 하듯, 너 차고 넘치는 천체여! 나 이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저 아래로 내려가려 하거니와 나 또한 저들이 하는 말대로 너처럼
몰락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강의 이유: 자명성(우리가 흔히들 자명하다고 일컫는 모든 것들, 기존의 도덕 관습 종교 등을
전복시키기 위해 실체적인 세계관에서 관계적인 세계관으로 변화: 태양의 의미는 태양이
비추는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확보되는 것이지 그 자체로 의미있는 것은 아니다.
태양이 차라투스트라를 비췄던 것과 같이 차라투스트라 또한 이러한 빛을
나누어주기 위해 하계로 내려가는 것이다.
- 성자와의 만남
신을 사랑하는 숲의 성자와의 만남: 인간세상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숲이라는 곳 하지만
높은 산에 비해서는 숲과 가깝다. 성자는 완전성, 근원, 그리고 인간계의 불완전성에
대한 근원을 찾기 위해 인간세상이 아닌 숲으로 들어갔고,
유한적인 사람을 긍정하고 사랑하지 못하고 무한성을 지닌 신에 대한 사랑을 설파한다.
성자에게 있어 하강한 차라투스트라의 모습은 어린아이 같고 춤추는 자와 같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가 인간세상에 내려와
설파하고자 하는 것들은 세상을 파괴시킬 것이며, 차라투스트라 자신도 세상의 증오에
의해 파괴될 것이라고 하며, 증거로 소크라테스와 예수를 든다.
- 성자와의 대화
사랑에 대한 관점: 성자가 말하는 사랑이란 동정과 연민을 말한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사랑하는 자가 파괴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사랑이란
그냥 주는 아가페적 사랑이며, 충만함의 흘러넘침, 되받을 것을 생각하지 않을 선물이다.
- '신은 죽었다' 선언
철학적 함의: 니체의 '신은 죽었다'선언은 철학적으로 서양의 형이상학적 이분법적 사고의
종말을 함의한다. 기존의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근간으로 한 형이상학적
이분법적 사고가 지배하고 있었는데
즉, Episteme(형상, 존재)의 세계(신의 세계, 칸트의 Ding an sich)와 doxa(현상)의 세계를
이분화시켜놓고 존재론적, 인식론적으로 Episteme의 세계에 우위를 부여해왔다.
하지만, 니체는 Episteme 세계를 대변하는 '신'이 죽었다고 선언함으로써
이러한 이분법의 종말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종교적 함의: 그리스도교의 신 개념 및 초월세계의 거부.
Q. 형이상학적 이분법이 왜 생기는 것인가?
인간은 심리적으로 확실한 것을 추구한다. 하지만, 인간이 살고 있는 현상의 세계에서는
매순간 자기 변화를 할 수밖에 없으며 이것에서 오는 불안, 고통, 근원적인 불안감이
인간으로 하여금 현상의 세계를 부정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변하지 않는 형상의 세계를 상정하게 되는 것이고 그것을 추구함으로써
현상의 세계에서의 삶을 부정하고 병이 들게 되는 것이다.
- 위버멘쉬에 대한 가르침
장소: 숲에 잇닿아 있는 도시의 시장 -> 대중들이 있는 곳, 진지한 대화와 전달이 불가능한 곳, 실패 예견
"나 너희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노라. 사람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너희는 사람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위버멘쉬의 개념에 대해서는 후에 영원회귀 사유와 힘에의 의지와 함께 좀 더 자세히 정리해보겠지만,
머리말에서 나타난 텍스트에 근거하여 간단히 설명하자면 신체로서의 인간,
대지에 충실하는 인간이 그 조건이 되며, 자기 자신을 경멸할 줄 알고 그것을
극복하는 창조적인 인간상을 의미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현대의 인간들은 자기 자신을 경멸하지 못하며,
즉, 자기비판력이 부재하여 자기 극복도 불가능하며, 모든 것을 작게 만들어 버린다.
- 인물분석
줄타는 사람: 위버멘쉬로 가는 심연의 밧줄을 탔다.
기존의 자명성에 대한 회의를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래도 의미가 있는 것은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며 즉, 자유정신으로의 시도를 하는 존재이기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익살꾼, 광대: '줄 타는 사람에게 네가 있어야 할 곳은 탑 속이었다.'
즉, 자명성 속에 묶여 있었어야 했으며 그를 뛰어넘었다. 줄 타는 사람은 결국 추락하고
말았고 자명성의 대변가인 이 익살꾼의 무게와 대결했을 때 그는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줄타는 사람의 위버멘쉬로의 도전 실패: "나 오래전부터 그 악마가 나타나 ~"
여전히 그리스도교 도덕(자명성)에 묶여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불완전한 자유정신인 것이다.
- 재시도의 결심
시점: 저녁 -> 사람낚는 어부가 아니라 송장만 낚는다.
차라투스트라는 시체를
- 차라투스트라의 세 가지 유혹과 극복
광대의 위협: 자명성의 대변가인 광대는 현대인이 차라투스트라의 말들을
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것이 자명성을 파괴하는 전복적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차라투스트라도 예수나 소크라테스처럼 죽임을 당할 것이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꿋꿋하게 갈 길을 간다.
송장 묻는 자의 위협: 성문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송장 묻는 자를 만나는데
차라투스트라에게 송장 묻는 자의 역할을 하라 한다. 이 말은 자기 극복의
실패물인 송장을 그냥 묻어버리는 것은 없던 일로 하고 다시 시도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이것을 거부하고 숲으로 들어간다.
예수의 유혹: 인간 세상을 떠나 예수가 주는 양식을 먹고 살아가자는 유혹.
자명성으로 다시 복귀 및 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차라투스트라는 배고픔이 덮쳐왔지만 그곳을 지나쳤다.
또한, 줄타는 자의 송장을 보호함으로써 위버멘쉬로의 시도를 하지 못하게
하려는 예로 이용되지 않도록 하였다.
- 새로운 방법
시점: 해가 그의 머리 위에 떠있는 정오
차라투스트라 자신의 자기인식의 변화: 창조를 위한 파괴
창조적 건설에 대해 이야기할 것을 암시.
차라투스트라의 짐승들 등장: 독수리 한 마리 (정신적인 것, 하늘, 긍지),
뱀 한 마리(물질적인 것, 지혜, 뱀)
영원회귀 사유를 갖추고 다시 인간세상에 가서 신의 죽음과 위버멘쉬를 설파하기로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로서 허무주의를 극복했으며 차라투스트라의 몰락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참고자료: 백승영 교수님 강의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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